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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자비하신 예수님’(마 4:23-25)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자비를 떠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긍휼을 받을 만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데도 주시는 것이지요. 죄인인 우리는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죄와 사망을 다스려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모든 환자를 데리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자비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보시고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자비하다’는 ‘긍휼히 여긴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긍휼히 여김은 ‘함께 고통을 당함’이라는 의미입니다. 긍휼은 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불쌍한 자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 그 사람의 입장에서 같은 감정으로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한 형식뿐인 제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며, 예수께서는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죄인인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받은 은혜대로, 나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공감하며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긍휼한 마음으로 도와준 것을, 주님을 섬긴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자비의 마음으로 기쁘게 섬겨줍니다. 약자나 장애인을 섬기는 삶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레 19:13-14)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말씀을 상징하며(렘 23:9), 기름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즉 상처는 말씀과 성령님의 도움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긍휼이란 자기를 희생하면서 불쌍한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바울은 주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 아그립바 왕을 긍휼히 여겨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라고 바울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아그립바는 애매한 대답으로 바울의 질문을 피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뵙니다.”(행 26:28-29)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긍휼의 마음을 갖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8장을 보면, 굶주리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면, 즉 동정함으로 선행을 행하면, 죄악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항상 든든하게 지켜주시고, 영혼육의 건강함과 풍성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10-1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와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마땅히 행할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엡 4:32) 진정한 긍휼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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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눅 12:35-40)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더 살기 좋은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역사의 수례 바퀴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시계는 종말이 가까웠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재림을 준비하며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절)고 말씀하심으로 다가올 심판을 준비하는 제자의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대비하여 믿음으로 굳게 서서 맡기신 일을 열심히 감당하며 깨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출 12:11).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이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함으로 하나님의 인류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금 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심판 즉 예수님 재림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받게 될 복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이란 더 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보다 재림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 초기 교회 목회자나 성도들은 지진이나 천둥 번개 소리나 전쟁의 포성의 소리를 듣고도 주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냐고 집이나 교회 밖을 나아와 하늘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너무 세상적인 관심에 깊이 빠져 있어서 그만큼 주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이 훨씬 멀어졌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확고히 서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간 종들에게 주인이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주인으로부터 종이 수종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37절).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깨어서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귀하게 여겨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섬김이 만만찮은 순간도 있을 것이고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주인을 마냥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도착했을 때 그렇게 깨어서 기다리는 종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38-40절). 분명히 오신다는 것은 예고되어 있지만 그 정확한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때와 기한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예비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예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늘처럼 풍요로운 세상에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쾌락과 염려가 우리의 천국 소망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 물질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재림에 대한 준비 자세가 아닙니다. 세상의 평안과 성공 세상의 안일한 삶이 목표인 사람은 술에 취한 사람과 같이 주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라면 영적인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그때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십시다.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며 재림을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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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천국 갈 준비’(수 23:14-16)
    천국 갈 생각을 하고 살면, 오늘이 가장 소중한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을 배우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 죽은 후에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는 천국 가기 전에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여 알려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온 세상 사람이 가는 길로 갈 때가 되었으니, 당신들은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이 명하신 언약을 꼭 지키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이어서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 반드시 망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려주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천국 갈 준비를 잘하였습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처럼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롭게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끝이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벧전 1:3) 우리가 가진 산 소망은 모든 고통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죽음이란 형벌이 아니라 오히려 형벌적인 요소가 죽음에 의해서 제거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로 변화시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히 12:23) 그래서 죽음은 성도에게 종말이 아니라 완전한 새 생활의 시작입니다. 성경을 보면, 죽은 자를 잠든 자로 말씀하셨습니다.(살전 4:13-14) 야이로의 딸이 죽어서 모든 사람이 울며 통곡할 때 예수께서는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눅 8:5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많은 사람이 슬퍼할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 1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는 것은 잠이 드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단지 쉼표일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를 그치고 참 안식을 얻기 때문입니다.(계 14:13) 그 안식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아주 없어지는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앞에 두고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구원의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시고 떠나실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이 되어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롭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천국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약 4:14) 요셉은 천국 가기 전에 자손들에게 이집트를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행해 가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해골도 이집트 땅에 매장하지 말고, 가나안 땅에 묻으라고 당부했습니다. 즉 요셉은 자손들에게 현재의 삶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도록 유언한 것입니다.(창 50:24-26) 우리도 요셉처럼 자손들에게 확실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있을 때 장차 상속받을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을 보면,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의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며, 불의한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천국 갈 준비를 잘하는 것입니다.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천국에 갈 준비를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고난도 당하지만 주님께서 그들을 모든 악으로부터 건져주셔서 천국에 들어가도록 보호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딤후 4:18) 천국은 눈물이 없고,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계 21:4) 그래서 천국에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소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때문인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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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예수님만 바라봅시다’(히 12:2)
    인생을 살면서 자기 한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의 한계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하고 주저 않습니다. 그래서 실패를 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낙심하고 좌절하며 무기력해지나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생명과 능력을 얻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평안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면 어떤 도전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세상 사람과 다르게 승리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또한 인생에서 방향을 잃어버려 방황할 때에 세상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스티븐 고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에 보면 ‘시간관리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관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얼마나 바쁘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일어설 수 있으며 방향과 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 62:1에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죽음의 위협을 받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만 바라볼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까?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5:8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정함이 없어 주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다른 생각에 미혹을 받습니다. 똑같은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모세는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약속을 굳게 믿고 기적을 보면서 살았는데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환경만 보고 현실만을 보게 되니 육신의 생각이 나오며 거기에 미혹이 되어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나 명예, 혹은 안락함을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방황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아름답고 선한 목표를 이루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만 향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은 예수님을 본을 삼아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항상 다른 것을 바라보게 역사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육신의 생각이 일어나서 시험에 들게 됩니다(약 1:4). 여러 가지 악한 생각이 나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달려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먹고 싶은 것 다 먹는 등 절제가 없다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힘듭니다. 힘든 자기와 싸움을 해나가야 합니다(고전 9:24-25). 예수님만이 우리 신앙의 푯대이십니다. 우리 삶의 목표이고 중심이며 시작이시고 생명이며 최고의 가치와 구원이시며 축복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며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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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나라 위한 기도’(대하 7:14)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는 의미 있고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반대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 악법 저지를 위한 기도회는 간절하고 절박했습니다. 현장에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를 향한 주님의 뜻과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나라와 민족을 구해야 할 긴급한 때입니다.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소망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다음세대들에게 올바른 성경적 가치관을 알려주고 건강한 가정, 거룩한 나라를 물려주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악한 길에서 떠나 악법이 제정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본문을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나라와 민족이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며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이 땅이 고침 받고 주님께서 다시 번영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우상 숭배와 동성애로 큰 위기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하나님이 내버려두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 우상 숭배와 동성애입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롬 1:23-24)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우상 숭배와 동성애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창조 순리에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제1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와 영광을 우상에게 바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7-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순리에 불순종하여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기 때문에 죄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성 연애하는 사람들이 속히 죄에서 떠나 건강한 가정을 이루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18-19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의 실상을 다 아시지만 그들에게 회개하여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의지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죄악이 가득해서 결국 유황과 불로 멸망했습니다. 소돔의 죄악을 보면, 저녁때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을 했는데, 롯의 간청으로 롯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잠들기 전에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19:5)라고 소리쳤습니다. ‘상관하다’라는 히브리어는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성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은 주된 원인은 비정상적인 성 관계, 즉 동성애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의 성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함에 빠져서 다른 육체를 좇았기 때문에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아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유 1:7) 이처럼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 질서와 성 질서를 무너뜨리는 큰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0장 13절을 보면,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값으로 죽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관계를 갖도록 하셨습니다.(창 2장) 동성끼리 성 관계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결혼 제도와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그래서 동성 연애하는 사람들이 속히 죄에서 돌이켜 구원받고, 대한민국이 거룩한 나라 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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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4-11-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영적 건축자’(눅 6:46~49)
    우리는 모두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집을 짓되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각자의 믿음의 집을 지어 가고 있습니다. 그 집이란 믿는 자의 삶이며 인생 전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에 관한 비유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엄숙하고 두려운 구절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46절)과 더불어 환난을 견디지 못할 것이며 또한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암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49절; 겔 13:10-16). 여기에서 반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순종을 가리키고 모래는 모래사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석이 나올 때까지 깊이 파지 않고 얕게 파다 말은 그냥 흙으로 된 터를 가리킵니다. 건물을 건축할 때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건축물 구조의 안전입니다. 특히 기초가 중요하기에 지반이 단단한 반석 위에 건물을 세우면 어느 곳보다 안전합니다. 고전 3:11절에서는 그리스도를 터(기초)라 하였고 눅 6장에서는 성도의 실천적인 신앙이 건축에 있어서의 기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세속에 빠지거나 정욕대로 살지 말고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자기를 건축한다는 것은 성도가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옷을 입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자기의 인격을 만들어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못하여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이들은 결국 그 집이 무너지기에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행함의 완성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에 대한 의지적 순종과 실천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참 성도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순종이 없고 실천이 없는 신앙은 아무리 지식이 많고 은사를 많이 받았어도 환난 풍파가 닥치면 곧 무너져 내리는 부실한 집과 같은 헛된 신앙인 것입니다.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칠”(48절) 때가 바로 신앙의 진위가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때에 순종의 반석 위에 지은 참 성도의 신앙의 집은 건재하지만 불순종의 모래성을 지은 불순종한 신앙인의 집은 그대로 무너지리라(49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의 영혼이 파괴되고 인격이 무너지면 좋아하는 것은 오직 마귀뿐입니다.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48절중)라는 말씀은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환경과 사건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나 시험과 환난의 날이 있습니다. 반석 위에 견고한 집을 짓기 위해서는 결코 듣는 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듣고 반드시 행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건물을 질 때 설계도면 그대로 짓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 뜻을 죽이고 자기를 부정하며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육신에 속한 자의 삶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경성하여 우리 신앙의 모습을 끊임없이 살펴보고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재료를 주십니다. 각기 다른 달란트를 주시고 사명도 주십니다. 그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짓느냐는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고전 3:12-1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말씀을 준행하되 정직과 성실로 최고의 믿음으로 나의 믿음의 집을 건축하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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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4-10-2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종교개혁을 바라보며’(시 31:1, 롬 1:17)
    종교개혁의 원리는, 첫째, 오직 믿음입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오직 성경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실의 표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시편 31편 1절의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말씀과 로마서 1장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을 토대로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루터는 말씀을 붙잡고 종교개혁에 집중했습니다. 우리도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야 이 시대의 개혁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성경이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일반 교인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고 사제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성경을 통해 이제는 개개인이 직접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복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나에게 들려지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을 아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성경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인생의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는 성경의 몇몇 구절을 읽을 때의 느낌을 ‘심장이 뛰다’, ‘달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루터가 로마교회와 싸울 때 끝까지 성경말씀을 붙잡고 싸운 것은 루터의 의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날마다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모세는 말씀을 먹고 얼굴에 광채가 나며 힘과 능력을 얻었습니다.(출 34:29) 예레미야는 말씀을 먹고 기쁨과 마음에 즐거움을 얻었습니다.(렘 15:16) 이처럼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루터는 면죄부는 구원과 영생에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감독의 유일한 의무는 백성에게 복음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죄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황제 칼 5세는 루터를 이단자로 제국에서 추방하고 그 누구도 루터를 도와주지 못하게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사상을 지지하는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 지냈습니다. 루터는 극심한 고통을 이겨내면서 성경연구와 번역에 매진했습니다. 그때 마귀는 루터를 굴복시키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자신을 괴롭히는 마귀를 향해 잉크병을 던지면서 “나는 세례 받은 사람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순간 마귀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마귀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에게 확신시킨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이름으로 마귀를 쉽게 정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루터는 복음을 대적하는 많은 원수의 무리와 싸움이 시작될 때 시편 46편을 토대로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만든 찬송이 바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가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내 힘만 의지하면 우리는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영적인 힘을 얻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비성서적이고 비복음적인 잘못된 것에 목숨 걸고 싸우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며, 말씀에 붙잡혀 살아야 하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시대의 개혁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개혁자는 끝까지 세상 속에서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개혁자는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딤후 3:12) 그러나 주님은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막 10:2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적인 가치는 중요하더라도 상대적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절대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박해를 이길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주님이 찾으시는 개혁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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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2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은혜를 입은 자의 삶’(출 33:19)
    성도라면 그 누구나 지나온 날들을 회상할 때 일절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믿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다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9절). 은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무엇을 받으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대가가 필요 없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돈으로 금은보석으로 권력으로도 이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며 하나님께서 뜻대로 주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넓고 큰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욥 5:9-11, 9:10-11, 11:7-9, 롬 11:33, 고후 9:14-15). 이를 통해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더 넓고 깊으며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 은혜의 고마움은 결코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 시 116:12-14에서 시인의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우리도 이 시인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로 배은망덕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망각하지 말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어 가나안 땅까지 오는 한 순간 한 순간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셨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천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끊임없이 계속해서 허락하여 주십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모든 과정들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볼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셨고(요 1:16)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산 것이 아닙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은혜와 평강을 더하여 주셨고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길을 벗어나면 영적으로 질식할 수밖에 없고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은혜가 있어야 사는 존재이오니 하나님의 은혜를 귀한 줄로 알고 마지막까지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합당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환경이나 상황을 만나든지 불평하지 마십시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로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원하십니까? 일절을 은혜로 여기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영광을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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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1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창조의 안식일’(창 2:1-3)
    안식일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날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휴식하신 하나님의 안식은 훗날 모세에게 주신 제4계명인 안식일 제도의 근거가 되었습니다.(신 5:15)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방법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안식”이 두 번 나오고 “복”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안식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시고 이날을 복되고 거룩한 날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로 회복이나 휴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가 담긴 것으로 안식일 제정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도 신의 안식은 제사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안식일 제정과 관계가 있는 것을 출애굽기 31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16-1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날에게 복을 주신 것은 일곱째 날이 유일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보시며 기뻐하시고 피조물에게 복을 주셨지 날 자체에 복을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는 다른 특별한 날입니다.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자 복 받는 길입니다. 거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레위기 10장을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의 분향단에서 첫 번째 향을 피우던 중 금지된 불을 사용해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거룩한 불이 아닌 속된 불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즉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해치는 일은 큰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안식일이 거룩한 것은 그날에 죄인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 자리에 초대를 받아 주님과 함께 안식의 은혜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날에는 나그네도 과부도 고아도 집안에 있는 육축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출 20:8-11)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죽어 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 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마 12: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날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죽음 가운데서 구원하셨듯이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예배는 무척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나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시 40:5-8) 예배는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은혜의 자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8장을 보면, 개구리 떼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삶은 죄를 회개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지 않았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죄를 짓고 살다가 회개 없이 주일에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면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 1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 예배는 합당한 예배, 즉 합리적인 예배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합니다.(요 4:23) 즉 성령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발을 금하고, 오락을 금하고,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고 거룩하게 지키면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58:13-14)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서 즐거운 삶이 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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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고전 11:1)
    사람에게 좋은 본이 된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절; 빌 3:17)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절대로 교만이나 우월감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말도 결코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자신의 신앙의 삶의 전체를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므로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행위나 실천은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본받는 것은 육신의 생각대로 살지 않고 날마다 죽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고 죽지 않으면 본받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심중에 새기고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만 살고자 소원하며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본을 보이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순종 온유와 희생과 겸손 섬김 용서에서 모범이 되셨기에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 세상을 본받아도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본받으려는 신자도 드물다는 것입니다. 유행과 관습과 쾌락을 따르고 명예 영광심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세상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에녹은 사악한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창 5:24). 노아 시대 역시 가인의 후손들의 악한 행실이 계속되고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였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창 6:5) 노아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노아는 할아버지 므두셀라로부터 증조할아버지 에녹에 대한 신앙교육을 받았기에 그의 마음속에는 금보다 귀한 믿음이 싹 트기 시작했고 증조할아버지 에녹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멸망당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땅엣 것을 생각지 않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본은 받아들이고 잘못된 본은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고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제자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요 순종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신을 깨뜨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성과 아집이 깨어지고 부스러져야 합니다. 깨어질 때 향기를 발합니다. 옥합의 딱딱한 껍질이 깨어질 때 향기를 발한 것처럼 육성과 고집이 깨어질 때 영적인 향기를 발하게 되고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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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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