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5(금)
  • 전체메뉴보기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그리스도를 본받음’ (고전: 1:26~31)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지식과 힘과 성공 자체에 관심이 집중돼 있습니다. 실제로 많이 배운 사람, 권세 있는 사람, 이름난 사람을 통해 큰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람의 인생은 자기의 생각이나 기대와는 다른 길로 가기 일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인 강자를 부르시기보다, 약점과 흠결이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 온전하여 진리를 따르는 순전한 사람을 택하셔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디안의 압제 앞에 숨어 있던 기드온을 부르시는 모습이나, 많은 군사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선별된 단 삼백 명의 군인으로 승리하게 하셨던 모습에서 이러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부모도 선지자 사무엘조차도 사람의 외모를 보았지만, 막상 하나님께서는 들에서 양을 치던 아담하고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를 정하실 때, 학문과 지위가 높고 유명한 사람들을 부르시기보다는,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도 이와 같습니다. 지위, 직분, 세력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어떤 것을 토대로 세워진 것인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유명세와 물질에 기반해서 세워진 경우에는 하나님을 향한 영광보다는 자기를 향한 영광이 되어 온갖 교만과 유혹과 세상 정욕의 앞잡이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권세보다는 이름 없이 봉사하고 헌신하며 기도하는 성도가 진정으로 교회를 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결핍된 요소가 있어 보일지라도, 진실하게 위로하고 섬기는 한 사람의 말과 행실이 절망한 사람을 일으키고 주변을 살리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진정 교회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살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작게 보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자랑과 정죄의 말만 무성한 인생이 아니라, 작은 아이같이 순전한 자들을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심으로써 교만한 자들의 마음을 낮추시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겸손하고 겸허하며 순전해야 하지만,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내가 알고, 내가 이루었고, 내가 옳고, 내가 더 강하다고 말하고 싶어 하며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신앙 안에서도 은근히 자기 의로움과 헌신, 자기 경험이나 지식, 기득권을 자랑하려고 듭니다. 이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을 교만과 기만으로 몰아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만을 꺾으셔서 구원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젖은 방식처럼 군대와 권세와 화려한 영광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낮아지심과 고난과 죽음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단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활과 심령 가운데 이뤄지는 것에 이러한 십자가 중심의 방향성과 온전한 믿음이 굳게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실패로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살리셨고 사람에게 진정한 삶의 은혜를 입혀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제로는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이며, 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나의 지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살며, 겸손히 주를 의지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5-11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④ 죄와 심판에 대한 인식이 구원의 시작이다: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의 여정
    로마서를 한 절 한 절 꼼꼼하게 살피는 이 여정은 우리 영혼의 상태를 정밀하게 진단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병원에 가면 내시경이나 정밀 검사를 통해 우리 몸 깊숙한 곳의 숨겨진 병을 찾아내듯,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실상을 가장 적나라하고 정직하게 비춰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서두를 지나 이제 인간의 죄에 대한 엄중한 진단서를 내밀기 시작합니다. "죄와 심판에 대한 인식이 구원의 시작이다"라는 이 선포는 우리가 왜 복음 앞에 서야만 하는지를 가장 강력하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을 알 만한 증거가 온 우주와 내면 속에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창조주께서는 인간 내면에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고,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자연의 신비로운 질서와 우주의 찬란함을 바라보며 조물주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지식 이전에 주어진 본능적인 감각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이를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 생각을 허망하게 하여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밀어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근본적인 뿌리는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바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을 앉히며,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화려한 우상들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려 할 때 나타나는 결과는 참혹합니다. 첫째는 허무함입니다.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아무리 세상의 성공과 쾌락으로 그 공간을 채우려 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갈증과 허망함에 직면하게 됩니다. 둘째는 영적 혼돈과 무질서입니다. 연줄이 끊긴 연이 잠시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 같으나 결국 바닥으로 추락하듯,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인생은 뒤죽박죽된 가치관 속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로마 시대나 오늘날이나, 성적 타락과 순리를 역리로 바꾸는 행태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이 맞이하는 혼돈의 정점입니다. 셋째는 죄악의 양산입니다.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어진 인간은 시기, 분쟁, 탐욕, 교만 등 온갖 불의를 제조하는 공장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우리 모두의 정직한 자화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이 엄중한 말씀을 주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내가 영적으로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인지를 자각하는 사람만이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아구까지 차오른 이 시대에, 우리가 살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완고한 고집과 무관심을 깨뜨리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내 인생의 주권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아무 조건 없이 안아주셨던 것처럼, 죄와 심판 앞에 떨며 나아오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주시고 참된 평강과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나의 죄인 됨을 깊이 인식하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 시작됩니다. 이 복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회복과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는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는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제자 삼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과 돌파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세우는 교육과 체계적인 선교 훈련에 집중하며,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5-1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천국 주인’(마 19:13-15)
    성경을 보면, 중요한 예배 자리에 어린이들이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에발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제단을 쌓고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린 후 모세가 명령한 대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할 때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수 8:35)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고, 봉헌식을 행하였을 때도 어린이들이 동참하였습니다.(느 12:43)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를 외칠 때 어린이들도 예수님을 찬미하였습니다.(요 12:12-13) 본문을 보면,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어린 아이와 천국입니다. 어린 아이의 원어 의미는 ‘친자식, 종’ 두 가지입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생물학적인 어린 아이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고난받고 살아가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즉 세상에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 취급 못 받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어리고 낮고 천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어린 아이 같은 우리를 품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낌없이 받은 주님의 사랑을 약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섬겨주어야 합니다. 그 당시 어린 아이와 여자는 사람을 계수하는 데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예수님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분이십니다.(찬송가 96장)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우리 자녀를 예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천국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갈 수 있는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천국에는 동서남북에 각 세 개씩 모두 열두 개의 문이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계 21:13) 그 문은 출구가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가는 천국 입구입니다. 그 문들이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나 있다는 것은, 천국은 만국에 흩어져 있는 모든 족속이 구별 없이 모이게 되는 곳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말씀은 성경에 1,000여 번 나옵니다. 회개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고 결단하는 행위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눅 9:23) 세상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리어 예수께로 왔습니다.예수께서는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주님께 돌아오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주님을 찾는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렘 31:33)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요? 그 당시 어린 아이 같은 존재인지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그 당시 어린 아이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모들은 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안수 기도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안수란 ‘위임’을 뜻합니다. 즉 이제부터 이 어린 아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찾는 자는 주님의 자녀가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품어주시고 가장 선하게 인도해주십니다. 천국 주인이 되기 위해 결단할 것은 무엇인지요?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5-07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③ 복음의 능력에 감격하라: 믿음으로 여는 구원의 문
    성경 전체가 영롱한 반지라면, 로마서는 그 반지 위에 박힌 보석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문을 열며 복음의 정수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저주받은 나무에 달린 수치였고, 지혜를 숭상하던 헬라인들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비과학적이고 미련한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세상의 비웃음과 거친 저항 속에서도 복음만이 인류를 살릴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했습니다. 이 능력은 세상의 심리학이나 철학적 솔루션이 만질 수 없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뿌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는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세 가지 핵심적인 구원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죄 사함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도덕적 결함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즉 '죄'로 보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피만이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우리 어떤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의 피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이 죄 사함의 은총이 내 것이 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의 근본적인 방향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둘째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죽어 있던 우리 영을 살려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는 우리 내면의 깊은 결핍과 갈증을 채웁니다. 인생의 성공이나 쾌락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만족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샘물처럼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영적 생명수가 되실 때, 우리는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천국의 기쁨과 샬롬의 확신을 누리게 됩니다. 이 생명은 단순히 죽어서 가는 천국만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게 하는 실제적인 힘입니다. 셋째는 존재 변화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의 영을 받게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닙니다. 세상의 출신이나 배경, 학벌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이 나를 규정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자들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정체성을 깨달을 때, 우리는 현재의 고난이나 질병, 경제적 위기 속에서도 결코 실패자처럼 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히 승리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복음의 능력은 언제 우리의 삶에 실제로 작동합니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증언합니다. 믿음은 하늘의 모든 축복을 여는 마스터키와 같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켜는 스위치입니다.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 의지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을 열고 주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믿음을 부어 주십니다. 그때 비로소 십자가와 부활, 영생의 진리가 지식을 넘어 생생한 실재로 다가오게 됩니다. 오늘날 세상은 여전히 십자가를 미련하게 여기고 합리적이지 않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지혜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식으로 영혼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지하시는 유일한 길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뿐입니다. 나를 살리고 존재를 변화시킨 이 복음의 능력에 다시 한번 가슴 벅찬 감격을 회복하십시오. 우리가 이 영롱한 복음의 보석을 가슴에 품고 증거할 때, 우리 가정이 살아나고 무너진 일상이 재건되며 민족과 열방이 주께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증인으로 세상 속에서 당당히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는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제자 삼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과 돌파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세우는 교육과 체계적인 선교 훈련에 집중하며,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5-0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 (시 104:10~23)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10절) 미국에 있는 센트럴파크(Central Park, 중앙공원)는 뉴욕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연간 2,500만 명이 찾는 매우 유명한 장소입니다. 이곳은 원래 마을과 농장, 채석장이 있던 땅을 오랜 공사 끝에 거대한 인공공원으로 바꾼 것인데, 지금은 뉴욕 시민에게 꼭 필요한 쉼터이자 도심 속 자연과 야생동물이 살아 있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뉴욕에 있는 이 센트럴파크는 1858년에 공사가 시작됐는데, 지금의 모습과 시설로 완성되기까지 근 한 세기가 걸렸다고 합니다. 오늘날 이 공원이 있는 맨해튼은 비싼 물가로 유명합니다. 2026년 현재, 일반적인 주거비용으로 평균 임대료가 월 5,000달러(약 740만 원)이고, 2026년 1분기 중위 주택가격은 약 128만 달러(약 18억 9,700만 원)입니다. 공원 남측인 센트럴파크 사우스 일대의 2026년 3월 중위 매매가는 530만 달러(약 78억 5,300만 원)에 이르렀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중앙공원을 설계한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이 공원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 이 땅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뒤에는 이 공원 면적만한 규모의 정신병원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은 현대인들에게 주는 강한 경고와도 같은 말입니다. 그 비싼 땅에 상점과 빌라를 건축하기가 더 쉬웠겠지만, 옴스테드는 바로 그런 도시일수록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자연 속의 쉼터가 더 절실하다고 본 것입니다. 위의 사례처럼,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거기에서 오는 평안과 쉼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동물과 온 땅을 위해 만드신 물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오묘하심과 놀라운 은혜가 담겨있습니다. 그 물을 어떻게 만드시고 흘려 보내시는지를 통해서, 온 세상을 돌보시는 은혜가 나타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인가 산을 오르면서, 골짜기 사이로 졸졸졸 물이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여기는 깊은 산골인데 어디에서 이렇게 물이 나오는 것인가” 하고 누구든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샘을 골짜기에서 솟게 하시고 산 사이로 흐르게 하셔서, 들짐승과 들나귀가 목을 축이게 하십니다. 새들은 그 물가에 깃들고 지저귀며, 나무들은 넉넉한 물을 받아 자라납니다. 곧 물은 어느 한 부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짐승과 새와 나무와 온 땅을 함께 살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잊지 않으시고, 각 생명에게 맞는 공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온 땅의 자연 만물과 사람들이 살아가게 됩니다. 기후와 토양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가 이 지구촌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 생명을 보존하고 영유하고 있습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물을 통해 땅에 열매를 맺게 하시고,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십니다. 먹을 것이 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것,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겨우 숨만 쉬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삶에 기쁨과 활력과 윤택함을 더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은 또 하나님께서 낮과 밤, 해와 달, 짐승의 활동 시간과 사람의 일하는 시간을 질서 있게 정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통치 아래 있습니다. 물을 주시고, 먹을 것을 나게 하시고, 쉴 곳과 피할 곳까지 마련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살리시고 지탱하시며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4-28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② 복음에 빚진 자: 은혜를 아는 자의 거룩한 부담감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을 마무리하며 우리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태도인 빚진 자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1장 14절과 15절에서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선포합니다. 그가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1,300km가 넘는 험난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그토록 가고자 했던 이유는 단순히 새로운 선교지를 탐방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갚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거룩한 채무 의식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온전히 누리는 삶입니다. 바울은 13권의 모든 서신서에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관용적인 인사가 아니라, 민수기 6장에서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신 축복의 기도를 계승한 영적 선포입니다. 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도록 돕는 힘이며, 은혜는 자격 없는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입니다. 그리고 평강은 그 은혜의 결과로 우리 영혼에 임하는 하늘의 평안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이 평안이 우리 영혼의 중심을 덮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암담한 현실과 환경을 뚫고 사명의 길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영적인 코이노니아를 통해 견고해집니다. 바울이 로마 성도들을 보길 간절히 원했던 목적은 자신이 받은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그들을 흔들리지 않게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믿음의 소문은 났지만 아직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한 상태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성령의 은사를 나눔으로써 그들을 견고하게 하길 원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잘 믿고 끝나는 이기적인 여정이 아닙니다. 한 성령 안에서 받은 은혜를 목장과 공동체에서 나눌 때, 서로의 믿음을 통해 격려를 받고 위로를 얻으며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은사가 누군가를 세우는 도구가 될 때 우리 모두는 비로소 영적인 아비와 어미로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신앙의 핵심 동력은 바로 빚진 자의 마인드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던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런 자신에게 찾아오셔서 조건 없이 용서하시고 복음의 비밀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는 사랑의 빚으로 읽어냈습니다. 은혜라고 쓰고 빚이라고 읽은 것입니다. 빚진 자는 그 빚을 갚기 전까지 평안할 수 없는 법입니다. 바울은 이 거룩한 부담감을 안고 평생을 달려갔습니다. 감옥에 갇혀 몸이 묶여 있을 때조차 그는 펜을 들어 편지를 쓰며 복음의 빚을 갚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혹시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비친 자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내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채무자처럼 취급하며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혜가 사라진 자리에는 안일함과 교만이 틈타지만, 빚진 자의 마음이 있는 곳에는 겸손과 사명이 살아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큰 사랑의 빚을 기억하십시오. 내게 주신 건강과 시간, 물질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 빚을 갚기 위한 도구임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무너진 영혼을 재건하고 이 땅에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는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제자 삼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과 돌파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세우는 교육과 체계적인 선교 훈련에 집중하며,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4-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9)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요 14:23)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본문을 보면,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까요?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주님과 베드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 후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말씀대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가 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것을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마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신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요일 3:20b)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마 4:19)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세주이신 것을 증언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예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짊어지셨듯이 너도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 용서를 받은 증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 용서받은 사람들은 그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야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4-19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성경의 보석, 로마서를 통해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라
    어떤 이는 성경이 반지라면 로마서는 그 반지 위에 박힌 ‘보석’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로마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복음의 정수를 가장 체계적이고 영롱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다양한 형태의 건축물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본질은 오직 ‘복음’이라는 기초 위에 서는 것입니다. 복음이 깊이 열리고 그 진리가 우리 안에 뿌리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던 역동적인 부흥과 선교의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안타까운 약점 중 하나는 지식은 많으나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과 인본주의적인 생각이 섞여 있다 보니 평상시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정작 거센 시험이나 환난이 오면 신앙이 쉽게 흔들리고 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순교하며 고난을 뚫어낼 수 있었던 비결은 복음이 그들 안에서 실제적인 능력이 되어 그들을 견고하게 세웠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고안해낸 이론이 아닌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에 걸쳐 여러 선지자를 통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셨고, 그 예언들을 역사 속에서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다는 혈통적 예언부터, 동정녀 탄생이라는 초자연적 징조,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해 고난받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온몸을 던져 이 모든 말씀을 응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신 “다 이루었다”는 선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구원의 서사를 완성하셨다는 승리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참 사람이시며, 영적으로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이 절묘한 신성과 인성의 조화만이 인류를 죄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 예수를 깊이 아는 것이며, 그분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심리학이나 철학적 솔루션이 인생의 지엽적인 부분은 만질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존재의 깊은 뿌리를 변화시키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로마서 1장 7절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복음이 들려질 때 마음이 열리고 예수가 믿어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현재 우리 삶에 질병의 고통이 있거나 경제적 위기, 혹은 사회적 실패로 인해 ‘루저’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이 복음을 소유한 자는 이미 우주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사망 권세를 이긴 승리의 유산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인간적인 염려와 불안이라는 사망의 패턴에서 벗어나, 내 안에 살아 움직이는 부활의 영을 붙잡으십시오. 복음의 진리 위에 든든히 설 때, 우리의 무너진 일상이 재건되고 가정과 민족이 살아나는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 영롱한 복음의 보석을 가슴에 품고, 세상 속에서 당당히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는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제자 삼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과 돌파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세우는 교육과 체계적인 선교 훈련에 집중하며,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4-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내 앞에 계신 주를 바라봄’ (행 2:14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25절). 교인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먼저 자기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기 쉽습니다. 또 예배와 교회생활에 익숙해지지만 실제로 마음은 무뎌질 수 있습니다. 외견상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교만과 미움, 욕심과 나태함,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가득합니다. 대개의 사람은 이런 현상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합니다. 그러다가 죄가 오래도록 습관이 되면 잘못인지조차 잘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보다는 정욕에 길들여진 자기 마음을 더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힘만으로는 자신의 죄를 면밀하고 정확하게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화와 깨달음을 얻게 될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비춰주셔야 사람은 자기 죄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성령의 조명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께서 오시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찌르실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절못을 깨닫고 돌아보게 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동침한 뒤, 그 죄를 숨기려고 우리아를 전쟁의 맨 앞에 세워 죽게 했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를 들었지요. 비유 속의 부자는 많은 양 떼가 있으면서도, 자기 손님을 대접하려고 가난한 자가 딸처럼 기르던 하나뿐인 어린 암양을 빼앗아 잡았습니다. 이 비유는 다윗의 탐욕과 불의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곧 다윗은 그 비유 속 사람을 강하게 정죄했지만, 곧이어 나단이 “당신이 그 사람이라”라고 말하자 그 말씀이 바로 다윗 자신에게 향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 하나님께 여러 가지 무거운 징계를 받게 됩니다. 칼이 다윗의 집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은밀히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이 해 아래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고, 말씀대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다윗은 개인적으로는 용서를 받았지만, 자기 죄의 결과와 징계는 매우 혹독하게 그의 가정과 왕실 위에 이어졌습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자신에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오순절에 일어난 신기한 현상만을 말하지 않았으며, 그 말씀을 통해 사람들의 죄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비추고, 숨겨진 생각까지도 드러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성도에게 필요한 또 하나는,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회개입니다. 죄를 덮어 두면 사람은 온전한 성도로 깨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죄를 죄라고 바르게 말해 주는 것이 필요하며,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지함이나 완고한 마음,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생각, 그러한 생활에 익숙함, 그리고 계속해서 죄의 행위에 속는 마음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는 길은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말씀, 정직한 회개, 그리고 십자가 앞에 자신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은 남의 죄를 볼 때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볼 때 비로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4-1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부활하신 주님의 세 가지 부탁’(요 20:19-23)
    주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능력도 행했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실 때 모두 도망갔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제자들이 증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고난당했고 순교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목숨 걸고 부활을 증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된 바울이 순교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 가지를 부탁하셨는데, ‘평강 있으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으라’입니다.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강은 모든 두려움과 근심을 뛰어넘는 마음의 평안입니다.(요 14:27) 그 평안은 내적이며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그 평강은 예수님을 믿으면 얻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되어야 이웃 관계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한결같이 주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평강이 없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삶을 통해 제자를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의롭고 정직하게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하는 데 처신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살전 2:10) 그럼 제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주님은 네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눅 17:1-10) 첫째,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죄짓게 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하루에 몇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종의 겸손한 삶의 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분별력 있는 삶을 살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네 가지 말씀을 기억하고 실행하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성령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눅 24:46-49) 제자들은 증인되기 위해서 40일 동안 말씀을 들었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렸습니다.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을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가 증인되게 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확실하게 성령께서 임하실 때 능력을 받아서 가족부터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하여 증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동행하시며 도와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벧전 1:3) 부활은 소망이며, 기쁨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신앙으로 기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6-04-0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