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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신년 논평 전문] “자유를 수호하는 책임 있는 신앙,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시다”
- 국제교회논평회는 2026년 신년을 맞아, 사회적 신뢰의 위기와 공적 책임의 혼란 속에 놓인 한국교회가 다시금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 공적 책임을 분명히 확인할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외형적 성장보다, 사회 앞에서 어떤 책임을 지는 공동체인가를 더욱 엄중히 묻습니다. 침묵해서는 안 될 때 침묵하고, 말의 품격과 진리를 잃을 때 신앙은 왜곡되며 교회는 공적 신뢰를 상실한다는 설립 초기의 경고를 우리는 다시 무겁게 되새깁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질서는 인간의 존엄,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라는 기독교적 가치 위에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이 자유의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자유를 지켜야 할 도덕적 책임의 주체입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며, 민주주의는 다수의 힘이 아니라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특별히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 안팎으로 스며드는 공산주의를 포함한 전체주의적 이념의 침투를 철저히 경계합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계급과 구조로 환원하며, 초월적 하나님을 부정하고 신앙을 도구화해 왔습니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교회는 자유를 박탈당했고, 신앙은 억압되었으며, 양심은 국가 권력에 종속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인간의 자유와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는 이념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신학적 혼란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밝힙니다. 국제교회논평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훼손하는 종교다원주의, 십자가와 회개를 희석시키는 자유주의 신앙, 창조 질서와 성경적 윤리를 상대화하는 동성애 옹호 신학, 그리고 복음과 세속 사상과 이념을 혼합하는 혼합주의 신앙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다른 길도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심을 증언합니다. 자유주의 신앙은 복음을 윤리로 축소하지만, 교회는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의 능력을 붙들어야 합니다. 혼합주의 신앙은 교회를 시대정신에 종속시키지만, 교회는 시대를 분별하고 말씀으로 시대를 비추어야 합니다. 교회의 공적 신뢰는 세상에 동조함으로 회복되지 않으며, 진리를 지키는 신실함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를 정치화하기 위한 기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특정 정파를 대변하지 않으며, 권력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를 훼손하고 신앙을 왜곡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공산주의적 세계관, 그리고 성경적 복음을 해체하는 왜곡된 신학과 극단적 이념에 대해 침묵하지 않을 책임을 분명히 인식합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방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6년 새해를 맞아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가 ▲자유 앞에서 책임 있게 서며, ▲권력 앞에서 양심을 지키고, ▲이념 앞에서 진리를 분별하며, ▲신학 앞에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사회 앞에서 신뢰를 회복하도록 공적 논평 사역을 흔들림 없이 이어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시다 2026년, 모든 혼란과 분열의 시대 한가운데서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것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교회의 중심은 이념도, 세력도, 시대정신도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떠날 때 자유는 왜곡되고, 진리는 상대화되며, 신앙은 이념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할 때, 진리는 분명해지고 양심은 깨어나며 교회는 세상 앞에서 다시 신뢰받는 공동체로 서게 됩니다. 우리는 선언합니다. 공산주의를 포함한 전체주의적 이념도, 종교다원주의와 자유주의 신앙도, 혼합주의와 성경적 질서를 해체하는 모든 흐름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2026년, 국제교회논평회는 사람을 따르지 않고, 권력을 의지하지 않으며, 이념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신앙, 십자가 앞에서 겸손한 교회, 진리 앞에서 담대한 교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는 이 고백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교회다운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있는가.” 2026년 1월 13일 설립자 박조준 목사 명예회장 림택권 목사 이사장 임우성 목사 논설고문 민경배 박사 · 정일웅 박사 · 정인찬 박사 논설위원 김열 박사 · 박순형 박사 · 김석주 박사 국제교회논평회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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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신년 논평 전문] “자유를 수호하는 책임 있는 신앙,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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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이 함께하신 땅’(출 9:22-26)
-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에게 학대받을 때,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에서 내보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도록 말씀하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출 5:1) 그 말을 들은 바로는,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겠다며 백성을 더욱 학대하고 노동을 무겁게 시켰습니다. 고집 센 바로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여 결국 열 가지 재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우렛소리와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우박이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나라가 생긴 그 때로부터 애굽 온 땅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곱째 재앙으로 우박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늘로 그의 지팡이를 내미니, 하나님께서 천둥소리를 나게 하시고, 우박을 내리시니, 벼락이 땅에 떨어지면서 번갯불도 함께 번쩍거렸습니다. 우박이 쏟아져 내리면서, 이집트 온 땅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할 것 없이, 들에 있는 모든 풀을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고센 땅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땅이 하나님이 함께하신 고센 땅입니다. 고센 땅은 요셉 시대부터 출애굽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창 47:27)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고센 땅은, 바로가 야곱과 후손들에게 목축할 수 있도록 준 좋은 목초지였습니다.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아버지와 형들에게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주어 그들의 소유로 삼게 하였습니다.(창 47:11) 고센 땅은 출애굽 때 파리 재앙도 면제된 곳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나는, 나의 백성이 사는 고센 땅에는 재앙을 보내지 않아서,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겠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나 주가 이 땅에 있음을 네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출 8: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고센 땅은 파리 재앙과 우박 재앙이 면제된 하나님이 함께하신 은혜의 땅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생존을 위한 싸움에 동행하시며, 조정하시며, 인도하시고, 모든 것에 자유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잊고 사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생명과 온전함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교류지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 땅은 이미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어질 것이 약속되어 있었습니다.(창 12:7) 하나님은 그 약속의 땅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힘을 얻고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여 그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은 하늘에서 내린 빗물로 물을 공급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몸소 돌보시는 땅으로서 하나님의 눈길이 해마다 정초부터 섣달 그믐 날까지 늘 보살펴 주시는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1:8-12)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잘 지켜서 힘을 얻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로 살며, 하나님의 눈길이 해마다 정초부터 섣달 그믐까지 몸소 돌보시는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기쁨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할 때 우리의 앞길을 책임져 주실 줄 믿기 바랍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 37: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경험하며,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함께 가시며, 뒤따라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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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이 함께하신 땅’(출 9: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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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분노 버리기’(민 20:10-13)
- “미련한 사람은 화를 있는 대로 다 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화가 나도 참는다.”(잠 29: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급하게 남을 정죄하거나 분노하는 습관이 있다면 버려야 합니다. 분노는 마귀에게 틈을 주기 때문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8절)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반역한 너희여”라는 말과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는 큰 실수를 했습니다. 모세의 실수는 하나님 말씀보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운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는 반석을 향하여 말로 명령하지도 않고 백성을 향한 격한 감정으로 반석을 두 번 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주님의 거룩함을 나타내기 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원망하는 백성에게도 이적을 베푸셔서 거룩함을 나타내기 원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모세가 격한 감정을 쏟아내서 주님의 거룩함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불평이 그치게 하시고, 모세와 아론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주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등 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세와 아론은 분노로 불순종함으로써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신뢰는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전에도 주님을 불신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고기를 실컷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채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22)라고 투정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했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친 행동은 공개적으로 주님을 신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잘못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도 공동체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분노와 불평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정의롭지 못한 분노는 버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목마른 영혼들에게 신령한 음료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는 신령한 바위에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3-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령한 음식은 만나를(출 16장), 신령한 음료는 광야생활 중 이스라엘 백성이 목마를 때 반석에서 솟아난 물을 가리킵니다.(출 17장)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식물과 음료는 참떡과 참된 음료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의미합니다.(요 6장) 야고보서 4장을 보면,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11-1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방은 거슬리는 말이거나 남의 명예를 훼손하는 말이며, 거칠고 불친절한 태도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모든 악독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을 버려야 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악한 언행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버리도록 생각과 말을 다스려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승리하는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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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분노 버리기’(민 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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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성도의 격(格)’(수 21: 1~7)
- 가나안 땅 실로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그리고 이스라엘 각 지파의 족장들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레위 지파가 살 성읍들과, 레위 지파의 가축을 기를 목초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들의 기업 가운데서 성읍들과 목초지를 떼어서 레위 사람들에게 내어줍니다. 그들의 형제애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제비를 뽑아 레위 지파를 위한 분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먼저 그핫 가족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은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에서 제비 뽑은 대로 성읍을 받았는데, 그 수가 열세 성읍이었고, 그핫 자손 중 남은 이들도 에브라임, 단,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서 열 성읍을 받았습니다. 또한,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잇사갈, 아셀, 납달리, 그리고 바산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로부터 열 세 성읍이 주어졌고, 므라리 자손들은 르우벤, 갓, 스불론 지파로부터 열두 성읍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레위 사람들은 각 지파로부터 성읍과 목초지를 분배받아, 그들의 삶과 사역을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레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즉 여호와가 그들의 기업이라는 선언은 레위인의 생계가 토지 수익이 아니라 예배 질서 속에서 공급되는 몫에 의해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레위인은 하나님의 선언하심 속에서 십일조와 함께 제사와 관련된 몫(제물의 일부 등)을 통해 생활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레위인을 무소유로 낭만화하려는 장치가 아니라, 그들의 지속적인 성소 봉사를 위한 공동체적인 처우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오늘날에도 목회자를 처우하곤 합니다. 레위 지파를 향한 이러한 처우는 그들의 소속의 중심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다른 지파가 땅을 통해 자리를 확보한다면, 레위인은 하나님과 그 예배에 붙들리는 방식으로 위치를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이 정체성의 기반이 되기 쉬운 사회에서, 레위인의 삶이 하나님 중심성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제도적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레위인은 성소 봉사를 위해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의미는, 레위인의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 즉 거룩함과 헌신과 율법 준수와 교육에 의해 규정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레위인에 대한 잦은 오해가 있습니다. 즉 레위인은 가난해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레위인을 무소유자로 미화하기보다는, 예배와 사역이 공동체 안에서 지속될 수 있도록 일꾼을 지탱하고 유지하도록 하는 제도와 규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레위인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의 사실과는 다른 오해입니다. 지파로서의 기업이 하나님이라는 특별성으로 인해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기 위한 토지는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거주해야 할 성읍과 가축을 키우기 위한 목초지는 다른 지파들로부터 각각 필요한 만큼 분배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말은 결코 추상적 낭만이 아니며,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소속되었으며, 땅에서는 다른 지파로부터 나오는 기업의 나눔과 십일조와 제사로 드려진 몫을 통해 삶을 영위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지속적인 하나님의 사역을 구현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입장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분과 레위적 원리에 따라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 함께 성립하는 자리입니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구별되어 예배와 봉사, 그리고 삶 속에서의 언약공동체를 유지하도록 부름받은 직분이며, 그 사명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 그리고 능력과 변화를 은혜로 받은 자들입니다. 부름받은 성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을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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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성도의 격(格)’(수 2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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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기다림’(눅 2:25-32)
- 누가복음을 보면,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이스라엘 역사의 어둡고 고달픈 시간을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현 상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적극적인 삶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불쌍히 여기시려고 일어나신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은 복되다.”(사 30: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시므온은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는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메시아를 이스라엘의 위로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으로 위로를 주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이 의로웠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고 하더니 과연 아기 예수께서 그 부모에게 안겨 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아기를 받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제 시므온은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를 본 것은 주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본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죽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보고 죽기를 원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그 약속을 기다리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통해 주의 구원을 확인했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죽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무엇을 기다려야 할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20-2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딛 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려야 합니다. 안나는 남편이 죽은 후 성전에 들어가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84년간 봉사하는 중에 아기 예수를 보았습니다. 안나는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아셀 지파에 속하는 바누엘의 딸로 안나라는 여예언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았다. 그는 처녀 시절을 끝내고 일곱 해를 남편과 함께 살고, 과부가 되어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겨왔다. 바로 이 때에 그가 다가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눅 2:36-38)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대림절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억하면서 또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도록 복음을 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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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기다림’(눅 2: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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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복 받는 길을 택함’ (수 8:24~35)
-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33-35절) 오늘 말씀의 내용은 아이 성을 정벌하는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광야 벌판에서 아이 성 사람들을 끝까지 뒤쫓아가서 칼로 모두 무찌릅니다. 성 안팎에 있던 모든 아이 성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그 날 아이 성에서 죽은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모두 합해 만 이천 명입니다. 이 전투 동안 여호수아는 손에 든 창을 높이 치켜든 채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이 성의 모든 백성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그는 그 자세를 유지하며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들은 모두 진멸했지만, 짐승들과 아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전리품으로 취했습니다. 전리품을 취할 때가 있고 취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하심과 그 선포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실패한 사람이 아간입니다. 아간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큰 위험에 처할 뻔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경시하고 탐욕과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결과로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고 눈에 보이는 재물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공동체 안에서의 거룩성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태도를 드러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그렇게 멸망한 아이 성은 오랫동안 폐허의 상징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여호수아는 전쟁에서 승리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에발 산에 제단을 쌓습니다. 그 제단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미 율법책에 명령해 둔 방식 그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들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제단 위에서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예배를 올리게 됩니다. 에발산에 쌓은 제단을 자연 그대로의 돌들로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출애굽기 20장 25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가나안 지역의 제단과 신전들은 종종 정교하게 다듬은 돌, 조각, 상징적 문양들로 장식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연 그대로의 돌을 사용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이방의 종교나 문화와는 다르게 하나님 앞에 “성별(聖別)”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의 화려함보다는 말씀과 언약, 순종이라는 보이지 않는 중심을 중요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자기의 욕심을 따라갈 때 교회와 공동체에 물의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날 장로들, 지도자들, 재판관들, 레위 제사장들, 그리고 온 백성이 언약궤를 가운데 두고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앞에 나뉘어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 모두 모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전해 준 율법에 기록된 복과 저주의 말씀을 빠짐없이 낭독하여, 전쟁의 승리 뒤에 온 백성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하였습니다. 신명기 27–28장에 따르면, 그리심 산 쪽에서는 순종할 때 주어질 복에 대해서, 에발 산 쪽에서는 불순종할 때 임하는 저주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큰 소리로 조목조목 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했고, 그때마다 백성은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 앞에도 언제나 복과 저주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포된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라감으로써 축복의 자녀가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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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복 받는 길을 택함’ (수 8: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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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의 형상대로’(창 1:26-27)
-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창 6:5-6) 이처럼 사람이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습은 사라지고, 죄악으로 가득 차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알려주었습니다.(롬 3:10-11)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사람을 인격적이고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대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 의지, 공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형상은 영혼육의 전인적인 인격과 성품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예수께서는 능력의 말씀으로 피조물을 주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없애심으로써 이 세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하는데, 사람은 스스로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이후 한 사람도 사망의 몸에서 스스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태초에 당신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골 1: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귀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삶이 마땅합니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으로 죄를 지음으로써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신 성자로서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의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 8:1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 8:14)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인도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우리의 영혼육의 온 형태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날마다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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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의 형상대로’(창 1: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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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이 시대, 하나님을 소유한 백성’(계 2:8~11)
-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9-10절) 예수님께서 요한을 통해 계시를 주셨습니다. 특히 일곱 교회를 향한 말씀이 계시록의 초반에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 편지를 써서 보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두 교회, 즉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만이 책망 없이 칭찬과 격려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서머나교회와 지도자가 겪고 있는 고난과 가난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9절). 그렇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서머나교회와 그 지도자는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은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을 제공합니까? 가난하면 불편함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가난하면 쉽게 업신여김을 받게 됩니다. 저절로 낮은 자리가 되어집니다. 볼품없고 빈약해보이는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여러 핀잔과 아쉬운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가난한 가운데서 느끼는 처절함과 불편함과 박대 속에서 더욱 필요하고 요긴해지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가난함은 어려움의 대명사입니다. 각종 고통의 중심에 처해있을 때 우리는 간절해지고 이때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픈도어 선교회는 매년 세계에서 기독교로 인해 박해받는 50대 국가를 선정해서 발표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와 아프리카의 수단과 나이지리아 지역은 수천명의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있어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수단은 박해받는 국가들 중 5위에, 나이지리아는 7위에 올라있을 정도로 기독교 탄압과 핍박이 심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박해받는 국가 50개국 중에서 주로 1위에 많이 올라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우리나라와 가장 근접한 나라, 북한입니다. 형제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들 국가들은 가난한 중에 신앙으로 인해 핍박까지 받고있는 실정입니다. 이들 국가를 위한 지원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특히 가난하고 위협받는 처절함 중에도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이 특히 그러합니다. 나이지리아는 인구의 약 46%가 기독교 신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안전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며 지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결코 안전한 시대에서 산다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반기독교인들로 인한 위험도 크지만, 자칭 유대인이라는 사람들로 인해 성도가 겪는 고난도 큽니다. 자칭 유대인이라는 의미는, 자신들이 선택받은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멀리하며 신앙인들에게 무거운 굴레를 씌우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성경은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실상은 사탄의 집단이라고 말씀합니다. 서머나교회에 하신 말씀은 오늘날 우리와 우리의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을 제대로 가다듬지 않고 방종하게 되면 자칫, ‘자칭 유대인’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소유한 자로서 그야말로 부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말씀으로 고난을 이겨내며 끝까지 충성하셔서 최고의 은혜를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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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이 시대, 하나님을 소유한 백성’(계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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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올바른 금식’(마 6:16-18)
-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모세도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40일 동안 금식하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금식은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영적인 힘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금식입니다. 평상시에도 문제가 있든 없든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약함과 악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와 재 등을 뒤집어씀으로써 자신이 금식하는 것을 알렸습니다. 위선적인 금식을 한 것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금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식은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삶의 원점으로 돌아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행위이지 사람들 앞에 자신의 경건함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억압받는 자들에게 관심 두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약한 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폭력을 멈추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행위가 동반될 때 진정한 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면 어떤 복을 주실까요?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8-9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가정, 교회, 나라를 위해 금식기도를 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로 동족인 유다 백성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에게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전했습니다. 3일 동안 주야로 금식한 것을 볼 때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 민족 말살정책은 무산되고 오히려 이틀 만에 대적들이 전멸하는 대역전을 경험했습니다. 금식기도의 힘입니다. 요나서 3장을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함께 부르짖어서 재앙을 면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 이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전해지자 왕도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습니다. 왕은 백성에게 “왕이 대신들과 더불어 내린 칙명을 따라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 떼든 양 떼든, 입에 아무것도 대서는 안 된다. 무엇을 먹어도 안 되고 물을 마셔도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7-9절)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10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함께 부르짖어서 재앙을 면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 금식의 힘입니다. 함께 기도하며 함께 금식할 때 주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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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올바른 금식’(마 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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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1~9)
-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2-3절) 바울이 그러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모하며 서로의 기쁨이 되고 면류관이 된다는 것이 서로 간에 얼마나 큰 힘과 능력과 삶의 기쁨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증오하고 혐오하며 핍박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형제자매로 부를만한 기쁨과 소망과 힘이 되는 많은 성도와 동역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사랑과 힘이 되는 성도들을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성도들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기를 권면하였습니다. 그 권면의 중심된 내용은 주님 안에서 서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름이 명명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모두 여인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에 의해서 설립되었기에 상대적으로 여인들이 많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에게 이 두 여인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볼 때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는 다소 어려운 관계전선이 형성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바울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애쓴 사람들이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는 일반적인 교회 안에도 이러한 상황들은 즐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는 성도들 간에 발생하는 심각한 감정의 깊은 골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각자 부족한 부분이 있기에 곧잘 트러블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점점 시험에 들게 되면 교회 전체에 어두운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각자 자기 마음이 있고, 자기의 삶의 방식이 있으며, 자기만의 유전된 감각과 방식이 있기에 서로 같은 마음을 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즉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고 강조한 것입니다. 제각각 특성과 기질이 다른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뜻을 가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온전히 합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일을 감당하려면 먼저 주님 안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관계하고 주 안에서 협력해야 하며, 주 안에서 모두의 목적을 두고 일치시키며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바울은 서로의 관계로 인해 침체의 늪에 빠진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기뻐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하며, 오직 기도로 간구하고 염려치 말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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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