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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호연 목사의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성경은 그 시대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3:1). 그 시대는 사사 엘리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마지막을 보내던 시대였는데, 성경에 의하면 그는 눈이 어두워져 처소에 누워있기를 밥 먹듯 했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3:2). 그는 육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분별력을 잃어 가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아들들의 비리조차 꾸짖지 못하는 그러한 상태였다. 과연 이러한 시대에 이스라엘의 소망은 무엇이며,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저들에게 전하여 이 민족을 바로 인도할 것인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삼상 3:3). 하나님은 그런 사무엘을 불렀다(삼상 3: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첫째, 이 민족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이상이 희귀한 시대라도 하나님의 등불이 남아있는 한 소망은 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고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 민족을 각성시키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예비하여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불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게 하리라는 사실이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훈련받은 사사요, 선지자였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장막, 여호와의 궤 앞에서 잠을 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늘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힘썼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했겠는가? 말씀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종으로서 훈련받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랐다. 그는 선생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하고 두 차례나 선생에게 가서 “부르셨냐?”고 물었다. 엘리도 얼마나 영안이 어두워졌던지 두 차례나 그것이 하나님의 부름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가서 자라” 했다. 그리고 세번 째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부른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하라 했다(삼상 3:9). 비록 노쇠한 엘리였지만 사무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이어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데 마지막 소임을 다 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러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엘리의 두 아들의 불의함을 보았고 그들을 심판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엘리는 사랑하는 제자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 말을 다시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엘리에게 이 뜻을 전했지만, 그는 아들들에 대한 저주를 자청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나서 아들들의 비리를 금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삼상 3:13). 부정(父情)에 끌려 아들들을 망친 셈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이와 같이 되지 않았는가? 영안이 어두워져 이상이 희귀한 시대가 되지 않았는지? 인간적 정리(情理)에 휘둘려 스스로의 죄조차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빠져 있지 않은지? 최근 일부 모범이 되어야 할 위치에 있는 교계 인사들의 메시지나 행태를 보면서 과연 이 시대가 엘리의 시대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의한 세력이 나라를 뒤 흔들고 무도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어째서 비겁하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 뒤에 숨는가? 이 말씀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을 말한 것이지 네 자신이 심판의 위치에 서라는 말은 아닐 터다. “용서하고 화합하라”는 메시지를 듣기 좋으나 그것을 사단마귀의 세력에까지 확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을 말씀에 근거하여 영적으로 분별하여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섞어 얼버무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한 때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분들이 이로 인하여 삯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현 시국 한국교회는 사무엘의 영성으로 무장돼야 하리라.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로하면서도 경고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 했다(삼상 12:20-25). 그래도 박조준 목사님이나 김진홍 목사님 같은 원로들이 계신 것에 감사한다. 전광훈 목사님이나 손현보 목사님 같은 분들이 주동이 되어 교회를 일깨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주류 신학교 교수들이 좌경화 되어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와중에도 학생들이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한국교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장차 하나님이 이 민족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비전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하나님의 부름에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성심으로 응답하는 종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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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호연 목사의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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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담임목사로 산다는 것은”
- 오랜만에 제주도를 갈 계획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러 가는 것은 아니고 집회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1박 2일 동안 세 번의 집회를 인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집회를 앞두고 다리 운동을 좀 무리하게 했었나 봅니다. 지하 3층에서부터 지상 9층까지 여러 번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나서 다음 날 봤더니 피부 이식을 한 발뒤꿈치 부분이 빨갛게 성이 나 있더라고요. 수술한 병원에 가보니까 무리하면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앞으로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총회 관계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제주 일정을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부고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로 김찬호 장로님의 빙모이시자 최성복 권사님의 어머니 김혜 권사님이 소천을 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조문소가 경남 밀양이었습니다. 밀양이라고 하는 곳은 저와 참 관계가 깊은 것 같습니다. 오래전에 밀양이라는 영화가 나왔지 않습니까? 저는 그 영화를 보고 굉장히 분노감을 가졌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죄의 은총을 마치 비아냥거리기라도 하듯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밀양시 기독교연합회에서 집회 초청을 한 것입니다. 저는 모든 일정을 다 제치고 밀양으로 갔습니다. 시립체육관에서 집회를 하는데 첫날 너무나 빈자리가 많았습니다. 보통은 그렇거든요. 첫날은 주최 측 동원으로 모이게 되지만 둘째 날부터는 강사의 실력으로 동원이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집회 두 번째 날은 자리가 거의 가득 찼습니다. 마지막 날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찼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최성복 권사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특별히 주변 교인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김찬호 장로님의 빙부이시자 최성복 권사님의 친부이신 최기주 장로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조문을 하러 직접 내려갔습니다. 제 생애 두 번째로 밀양에 간 것입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6년 후, 김찬호 장로님의 빙모이시자 최성복 권사님의 어머니이신 김혜 권사님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정말 조문을 앞두고 많은 씨름을 했습니다. 네비로 찍어봐도 정확히 4시간이 나오는 것입니다. 왕복이면 8시간이고 예배드리고 앉아 위로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 포함하면 9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김찬호 장로님께서는 극구 내려오시지 말아 달라고 사정을 하셨지만 제가 안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려가면서 어차피 저는 차 안에서 일을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전날 저녁에 설교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미리 써머리를 했습니다. 가는 길에 주일 낮 설교를, 오는 길에 주일 밤 설교를 불러주기 위해서요.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발뒤꿈치 상처 부위에도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잡는다든지, 속도를 낸 상태에서 회전을 하는 경우를 대비해서요. 실제로 그런 순간순간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락 한 단락 설교문을 이어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김찬호 장로님이 아니라면 간접 조문을 할 수가 있죠. 우리 김찬호 장로님은 우리 교회 재정부장을 10여 년을 넘게 섬기고 계시고 십일조도 최상위 그룹으로 하며 클라팜파 회장을 맡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김찬호 장로님 때문에 또 한 번 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가면서 설교 준비를 거의 다 했습니다. 설교 준비를 마칠 때쯤 차에서 좀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수요예배가 시작될 무렵이어서 유튜브를 켜놓고 수요예배에 참여를 하였습니다. 그날 김선명 목사님이 설교를 하였는데 통상 담임목사가 없으면 부목사가 설교를 하고 기도하고 축도를 하는 게 일반적이거든요. 그런데 비서실에서 담임목사가 오고 있다고 김선명 목사에게 시그널을 보냈나 봐요.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 기도하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냥 목사님이 축도를 하고 끝내시라”고 문자를 보내놨지만, 김 목사는 그 문자를 보지 않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거의 10분 가까이 광고하고 찬양하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부리나케 교회에 도착해서 강단으로 올라가서 기도하고 예배를 마무리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생각해 봤습니다. 담임목사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담임목사가 아니라면 밀양에 갈 필요도 없으며 담임목사가 아니라면 오가는 길에서 그토록 애를 써서 설교 준비를 할 필요도 없으며 담임목사가 아니라면 수요예배가 끝나기 전 부리나케 도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얼른 보기에는 담임목사에게 많은 힘과 권한과 명예가 주어진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담임목사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권한과 힘과 명예를 가진 만큼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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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담임목사로 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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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중보기도의 힘’(출 32:11-14)
-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대한(大韓)은 고종이 최초로 호칭하였고, ‘세상을 밝히는 큰 지도자’라는 의미입니다. 대한민국의 호칭은 매우 중요합니다. 2008년 8월 8일부터 24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그때 204개국이 출전했는데, 대한민국은 17번째 들어가는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으로 격하시켜서 179번째로 입장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20위까지만 관심을 두고 본다고 하는데, 대단한 홍보 효과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상을 밝히는 큰 지도자의 사명이 있는 자랑스런 나라입니다. 그 대한민국은 지금 위태위태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 5:14) 그래서 악한 세력이 떠나 이 땅이 고침 받고 주님께서 다시 대한민국을 번영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한 모세는 백성의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1-13절)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재앙을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14절) 이처럼 기도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백성이 금 신을 만들어 큰 죄를 범하였을 때도 모세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고 목숨 걸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대한민국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굳건하게 서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을 듣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것을 알고 내려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하실 일을 알고 주님께 가까이 가서 의인이 악인과 더불어 멸망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아뢰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의 실상을 다 아시지만 그들에게 회개하여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의지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공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의인 50명만 있으면,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만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과 불로 멸망했습니다.(창 19:24) 그럼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응답 안 된 것일까요?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엎으실 때에, 롯을 그 재앙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창 1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을 재앙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힘입니다. 에스더 4장을 보면,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로 동족인 유다 백성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에게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라고 전했습니다.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유다 사람이 대적들을 진멸하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금식하면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사람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자 많은 사람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3일 동안 주야로 금식한 것을 볼 때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고백은 동족을 위해 자신이 죽을지라도 왕 앞에 나가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신앙의 결단이지요. 그런 용감한 결단으로 유대 민족 말살정책은 무산되고 오히려 이틀 만에 대적들이 전멸하는 대역전을 경험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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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중보기도의 힘’(출 3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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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예수께 내어 맡기고 구속한 주만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 8:17) 사순절에 주님을 간절히 찾아서 뜨겁게 만나기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계시자이시며, 인간의 연약함을 돕는 중보자이신 것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려면, 경건 훈련을 해야 합니다.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합니다.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딤전 4:7-8) 경건은 사랑 실천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약 1: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순절 경건 훈련으로 회개, 절제, 기도 순으로 말씀을 살펴봅니다. 회개는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고 결단하는 행위입니다. 회개하는 날은 새롭게 되는 날, 편히 쉬는 날, 상쾌하게 되는 날입니다.(행 3:19) 우리는 회개를 통해 구원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고후 7: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항상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것은 심판받을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죄 용서받을 기쁨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더욱 회개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더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가 생각나는 대로 더욱더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57:15b) 그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열심히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19) 회개는 오늘 바로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자유는 성숙한 절제에서 오는 것이지요. 절제하면 낭비하지 않고 목표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이웃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모든 것에 절제할 수 있습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갈 5:22-23) 사순절에 무엇을 절제해야 할까요? 첫째, 음식 절제입니다. 에스겔 16장을 보면, 소돔성이 멸망한 다섯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교만, 음식물의 풍족함, 태평함, 가난한 사람 돕지 않음, 우상 숭배입니다. 음식물의 풍족함은 너무 먹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과식은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사순절에 음식을 절제하고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배부른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말의 절제입니다.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잠 1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분노의 말과 부정적인 말을 삼가야 합니다. “속된 잡담을 피하십시오. 그것이 사람을 더욱더 경건하지 아니함에 빠지게 합니다.”(딤후 2: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쓸데없이 지껄이는 잡담은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침묵도 중요한 말입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해주는 침묵 훈련을 해보기 바랍니다. 셋째, 시간 절제입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엡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없이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 오병이어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실 때도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께서는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해 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면, 말씀으로 우리를 고쳐주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끌어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시 107:20)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확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면 기도응답이 된 것을 믿기 바랍니다.(요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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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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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 (엡 5:17~21)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어리석은’이라는 단어는 매우 좋지 않은 단어입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나 어른으로서, 성도로서 반드시 당연히 갖춰야 할 조건들을 갖추지 않았을 경우에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어리석음은 슬기롭지 못하고 둔한 경우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리석음의 반대는 지혜로움입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되는 것은,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만 되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혜도, 사랑도, 은사도, 믿음도, 아름다운 소망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귀한 은혜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따라, 지혜를 주실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믿음을 줄 만한 자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달란트를 주실 때도 그 사람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소유를 맡겨주셨다는 의미 속에는 사람마다 각각 고유한 인격과 역할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 각각의 인격과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사람에 따라서 일의 운용방식이나 책임과 인품은 제각각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받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는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막상 눈이 감기고 귀가 닫혀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신이 스스로 귀하다고 생각하는 일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돼지에게 진주를 주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이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귀한 자원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본문 말씀은 술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술 취함은 방탕한 것이라 했습니다. 술은 일반 음식이나 음료와는 달라서 그것을 섭취함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어둠의 경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는 서로 화답하며 지내야 합니다.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이야기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19절). 교회 안팎에서 성도들이 만나면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눌까요? 사람 이야기, 목사 이야기, 어느 성도 이야기, 사건 이야기 등 다양할 것입니다. 물론 필요한 말을 해야 함이 당연하지만, 기본적이고 근본적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이야기나, 은혜받은 이야기,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하심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서로 간에 영적인 은혜를 누릴 수 있을 만한 주제와 내용이 오가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계절, 새로운 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사는 동안, 우리나라와 교회와 각 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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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 (엡 5: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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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신앙의 발견’ (막 10:17~22)
- 본문에 등장한 이 사람은, 본문 후반에 가면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나오며, 마태복음에는 재물이 많은 ‘청년’으로,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유하고 안정된 직업을 가진 젊은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신변이 남부러울 만큼 갖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한 마음과 알 수 없는 미래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한계상황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날 결심을 하고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겸손해 보이는 자세를 취하며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 또한 가장 예수님께서 듣기 좋아하실 것 같아보이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젊고 부유한 청년은 하나님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으로 보아 더욱 그러함을 알게 됩니다. 이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볼 때, 그는 사실 주님과의 깊은 만남이나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깨닫지도, 실천하지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온전하지 못한 성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는 있지만, 마음 중심에서 허무함과 허탄함을 갖고 하나님과 긴밀한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현대 교인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해보면서, 나 자신은 이러한 사람이었거나, 현재 이러한 삶을 사는 자는 아닌지 무거운 고민을 해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고민은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음성을 통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18절 말씀(“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은 얼핏, 예수님조차도 선하지 않은 분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질문자가 어떤 마음으로 질문했는지에 따른 예수님의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칼뱅(John Calvin)은 18절,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내가 하나님에게서 온 사실을 너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거짓으로 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구나”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심에서 나온 표현이 아닐 경우에는 상대방을 괜히 띄워주고 바람잡으려는 역할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진정한 마음을 갖고 순수하고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젊은이가 평소 계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젊은 부자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 사람과의 관계에 해당하는 대인(對人) 계명 여섯 가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십계명 중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제1~4계명을 생략한 이유는, 여섯 가지 대인 계명이 제1~4계명의 실천적인 방안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제대로, 진정으로 잘 섬기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향한 관계 또한 제대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순으로 적용할 할 경우, 즉 가까이 있는 보이는 사람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자라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젊은 부자의 대답(20절,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은 단지 본인의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겉보기에는 흠이 없을 정도로 계명을 지킨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그는 하나님과 사람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앙적 열심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말씀을 이어가신 것입니다(21절). 그 젊은 부자가 놓친 것은 자기가 그토록 아끼고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는 물론 하나님과도 나눌 수 없었던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주신 주님의 말씀은, 비단 돈을 아까워하지 말고 어려운 자를 도우라는 단편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보다는, “너가 진정 원하고 바라고 사랑하는 바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시는 의미가 더 강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중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으로써 우리 삶의 실천적인 부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터치하시고 점검하신 것입니다. 2천 년 전 젊은 부자에게 말씀하셨던 그 말씀은 오늘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주신 예수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진정으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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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신앙의 발견’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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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김호연 목사의 ‘제2의 건국전쟁과 한국교회’
- 12.3계엄이 선포된 지 2개월이 지났다. 처음 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갑자기 웬 계엄이냐는,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과거 5.18계엄을 경험했던 세대는 대통령의 계엄선포에 대해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대통령에 대한 극언을 쏟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비록 당시는 소수였지만, 계엄은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며 통치행위일 뿐 대통령에 대한 내란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더구나 대통령의 담화문을 보면 계엄을 선포한 두 가지 주요 이유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 지금 대한민국이 얼마나 위기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는 것과 둘째, 그간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나 한 번도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던 부정선거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당대표의 숱한 범죄혐의와 사법 리스크로 수세에 몰렸던 야당은 호재를 만났다는 듯, 즉시 이 문제를 내란죄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5.18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국회의장은 국회담을 넘으며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속으로 뿌듯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보통시민이 보기에 이와 같은 행동은 매우 유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MBC, JTBC 등 언론노조에 장악된 좌파언론은 물론 소위 “보수”라고 치부되던 조중동 매스 미디어들은 일제히 대통령을 비난하며 헐뜯기에 나섰다.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이 저들의 제1목표인양 온갖 가짜뉴스로 지면을 도배하며 여론을 호도했다. 국민을 개, 돼지로 안 것이다. 검경, 공수처와 일부 좌파 판사들은 마치 사냥개처럼 대통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헌법재판소 역시 헌법재판이 아닌 인민재판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불법재판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온 나라가 불법이 판을 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를 대하는 대통령의 태도는 의연했고, 시민들은 각성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드러난 것은 내란이 아닌 반국가세력의 실체였다. 대남사업의 주요 직책에 있다가 탈북하여 남파간첩의 실상을 증언한 김국성의 말에 따르면 이제까지 남파된 간첩의 수가 15만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에게 포섭되어 3년이상 고정간첩질을 하고 있는 자들의 수는 150만을 헤아린다. 간첩, 간첩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들 종중, 종북좌파 카르텔의 실체가 이번 계엄을 통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대통령의 계엄선포는 이러한 위기에서 나라를 살리고자 한 구국의 결단이었다. 국민은 계몽되었다. 2030세대들의 집회참여가 급속히 늘어났다. 그들은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었다 라고 말한다. 계엄 초 20%대까지 위협받던 대통령 지지율은 50%를 넘어섰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이 나라의 위기상황과 부정선거의 실상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 채, 중국 공산당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자유민주 공화시민들이 각성되었고, 이제 그들은 반국가세력을 몰아내고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굳건히 세울 유일한 대안으로 떠 올랐다. 2030이 선두에 나서기 시작했고, 6070은 든든한 후원세력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모습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일어나 기도하고 외쳤던 민족교회의 전통에서 보면, 부끄럽다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회는 총회나 연합회 차원의 어떠한 성명도 내지 않았다. 일부 지방 연합조직이나 개교회 중심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광화문 집회나 SAVE KOREA운동을 주도하면서 상황을 반전시킨 주역들이 개신교회 목회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애국교회의 전통이 이들을 통해 그나마 숨쉴 자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입국론을 들고 나라를 세우려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제1의 건국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대통령의 계엄으로 촉발된 제2의 건국전쟁을 승리로 마감할 사명을 받았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문제나 체제전쟁을 너머 영적전쟁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인본주의적 제국주의, 공산주의, 독재와 싸워 이 나라를 지켜왔다. 하나님은 이 위기를 너머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가 공산주의, 동성애, 페미니즘이라는 악한 좌파사상에 빠져 죄악으로 치닫는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불의에 빠진 세계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 민족을 연단하고 계시다. 우리는 이 폭풍우 너머 찬란히 빛날 대한민국의 미래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에 주목하고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때 쓰시려고 이 나라를 세계가 주목하고 각광받는 나라가 되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한 뜻으로 교회 안팎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믿음으로 이 비전을 선포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이여, 이 민족을 사용하사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한국 개신교회의 위대한 전통을 이제 제2의 건국전쟁의 승리로 완성하고,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이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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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김호연 목사의 ‘제2의 건국전쟁과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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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그 믿음’(삼상 14:6~15)
- 예수께서는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막 뒤덮일 위험에 빠질 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니 바람이 그치고 고요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막 4:4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데 아직도 두려워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블레셋 군대는 무기도 병사도 막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나단과 한 병사가 블레셋 군대와 싸운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지요. 이런 용기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에게 무기나 사람을 의지하지 않도록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주님께서 반드시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하실 것을 믿음으로 말한 것입니다. 요나단은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9-10절)라고 말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에게로 올라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승리하도록 해주신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11-12절)라고 요나단은 확신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요나단과 한 병사를 얕보고 그들에게로 올라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에게 “우리에게로 올라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의 표징이었습니다.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명 가량”(13-14절)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있던 게바와 블레셋이 진을 친 믹마스 사이에는 양쪽으로 험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요나단과 한 병사도 블레셋 진영으로 가기 위해 그 험한 절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주님의 역사로 좁은 지역 내에서 요나단과 한 병사가 승리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무기나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1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블레셋 진영과 블레셋 백성이 불안과 공포에 떨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주님의 역사를 보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여기서 떨림은 ‘공포’라는 뜻입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이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공포감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땅도 진동한 것은 지진이 일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 지진이 나옵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귀신 들려 점을 치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 여자가 따라오면서 여러 날 귀찮게 하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 여자의 주인들은 돈벌이가 끊어지자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매로 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터전이 흔들렸습니다. 곧 문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습니다.(행 16장)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이처럼 굳센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2) 믿음 없이는 죄 사함 받을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합니다.(약 5:15) 믿음은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승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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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그 믿음’(삼상 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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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은혜의 약속’(창 2:16~17)
- 사람의 인생 안에는 알게 모르게 계약, 언약, 혹은 약속의 관계가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계약’이라고 하면, 부동산이나 각종 매매와 사업 관련 계약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약 말고도 사람과 사람 간에, 사람과 국가 간에, 그리고 사람과 기업 간에 본의 아니게 각종 계약이나 약속의 관계가 만들어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와 자녀 간에도 부모로서의 자격과 역할, 자녀로서의 자격과 역할이 주어지게 되어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는 책임이 생기게 되며, 자녀는 부모의 말씀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가정 내 질서를 따르는 의무가 주어지게 됩니다. 국가와 개인 간에도 이러한 역할이나 책임이 따라오게 되어 국가는 여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국민에 대해 국가로서의 의무와 구제 방안을 시행하는가 하면, 국민은 납세의 의무라든지, 국방의 의무라든지 이러한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인생을 사는 동안, 비록 서류상의 의식적인 결정의 과정이 생략된다 할찌라도 은연중에 각종 계약이나 약속의 관계에 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병원에서 수술을 할 때나,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는 경우에도 만약의 경우 본인이 사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각서를 쓰는 경우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간에도 분명한 계약과 언약이 있는 것입니다. 언약 안에는 약속과 함께 요구가 들어가게 됩니다.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믿지 않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언약으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따라 영생과 죽음이 선포된 ‘선악과 언약’이 있고(창 2:16-17), 다시는 물 심판으로 지상의 생물들이 멸망 당하지 않을 것을 선포하신 ‘무지개 언약’이 있으며(창 9:8-11), 십계명과 율법을 주신 ‘시내산 언약’(출 19:5-6)이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면 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각각 모여 목도하게 된 ‘모압 평지에서의 언약’(신 29-30장)이 있습니다. ‘선악과 언약’의 경우 인간의 행위에 의해 복과 저주가 결정되므로 이를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며, 나머지는 주로 ‘은혜언약’으로 부릅니다. 이런 의미 가운데, 본문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하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의 외출을 앞두고 치명적인 사고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미리 당부해주는, 위험에 대한 경고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과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부모의 선한 의지와 사랑이 담긴 경고나 메시지를 엄수하는 자녀는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되고 부모와의 좋은 관계 속에서 연속된 축복의 약속을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부모의 사랑과 경고를 무시하며 살다가는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도 이러한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불순종으로 행하다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으며,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의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까지 죄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자신들만이 아니라 모든 후손들까지 죽음에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 사건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하나님과 그 자녀 된 우리와의 관계, 즉 언약의 관계는 지금도 똑같이 적용되며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언약을 귀히 여기며 충실히 따르고 적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은혜를 누리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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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은혜의 약속’(창 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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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 28:15)
-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항상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요 14장)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마 1:23) 본문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 꿈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갈 여호수아에게도(수 1:5), 다윗이 죽은 후 성전을 건축할 솔로몬에게도(대상 28:20), 이 땅 위에 남아 복음전파 사명을 완수해야 할 제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진 약속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일하면서 자신과 항상 함께 계시는 주님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창 31:5)라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은 임종할 때도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창 48:2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 것은 이미 족장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2b)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사라의 여종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쫓겨나 광야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주셨습니다.(창 21:2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사람들과도 함께해 주십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아무도 의지할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실 때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과 함께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사 4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너’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역대하 13장을 보면, 아비야와 여로보암의 전쟁에서 유대 왕 아비야는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심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12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누구와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은 그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은 사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한 개인에게 임하시면, 성령님은 그와 함께하시며 도와주실 것을 이미 예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권세가 끝날 때까지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탄의 권세가 지배하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26)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막 13:33)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엡 6:12)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악한 모든 세력에 대항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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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 2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