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5-08(목)
  • 전체메뉴보기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자녀들이 묻거든’(출 12:21-28)
    자녀들이 묻거든 성경에서 답을 찾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중요한 두 가지가 말씀과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며,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 5:3-4) 본문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말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를 불러서 너희와 너희 자손이 유월절 규례를 영원히 지키고, 후에 너희 자녀가 이 예식에 대해 묻거든, 이것은 주님께 드리는 유월절 제사인데, 주님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의 집만은 그냥 지나가셔서, 우리의 집들을 구하여 주신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참 자유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고전 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질문에 이어 성경에서 자녀들이 궁금한 것을 물을 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자녀들이 왜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여야 하는지를 묻거든,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을 때 바로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처음 난 것을, 사람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셔서, 처음 태를 열고 나온 모든 수컷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고, 아들 가운데서도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는 것이라고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3:11-16)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훈령과 규례와 법도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규례를 명하여 지키게 하신 것은,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만 하면,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가 잘 살게 하여 주실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될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6:20-25) 자녀들이 요단강에 있는 열두 개의 돌들이 지닌 뜻을 묻거든, 주님의 언약궤 앞에서 요단 강 물이 끊기었다는 것과 언약궤가 요단 강을 지날 때에 요단 강 물이 끊기었으므로 그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토록 기념물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 4:7) 위 질문의 공통적인 대답은, 주님께서 그들을 바로의 노예에서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를 되새겨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열두 지파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영원토록 자손들에게 기념물로 남겨주는 그들의 신앙과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떠날 것인지, 어떻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것인지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알려주어야 합니다.(신 6:5) 신앙생활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을 왜 공경해야 하는지 묻거든,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약속이 있는 계명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주 너희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신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님을 참 조언자로 중요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부모님을 공경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골 3:20) 부모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여 낙심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격분하게 하여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 “어버이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격분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골 3: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격분하게 하는 것은 잔소리를 하거나 멸시하여 분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의기를 꺾는 것은 낙심하고 자포자기하여 자라나는 심령이 훼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비전을 갖고 당당하게 살도록 슬기롭게 양육해야 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5-05-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이 세상에서 성도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유명함과 탁월함을 보려고 구름떼처럼 몰려든 당시의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7-8) 예수님께서 이러한 질문을 하신 것은, 많은 군중들이 세례요한을 보러 광야에 나간 이유가, 깊은 영적 진리를 찾고 그것을 따르기 이르기 위함보다는, 갈대같이 흔들리는 마음을 갖고 훌륭한 옷이나 외모를 보러 간 것이 아니냐는 사실에 대해 지적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온통 정욕적인 속셈을 갖고 사는 곳이 이 세상이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재무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와 성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자기 자신도 이중적이고 가증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선택된 나라가 이스라엘인데, 선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진실하고 순전한 사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어느 한 사람, 나다나엘을 향해 그가 사심이 없음에 대해 기뻐하시면서, “너야말로 참 이스라엘인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을 따라서 순수하고 온전하게 사는 사람이 드문 현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주 여호와의 영이 임하셔야 합니다. 기름 부으신다는 의미는 세워주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시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며, 믿음의 사람을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바로 이런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즉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보내셔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우리도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교회의 주된 사역으로 표방해서, 이름부터 특색있게 짓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희망의 소식을 들려주어야 하며, 절망이 아닌 소망과 생명과 치유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나 사상, 물질이나 돈, 혹은 유흥과 각종 중독적인 성향에 포로가 되어 묶여있고,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육신과 영혼에 자유를 선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은혜받고 치유받아야 하며, 말씀으로 깨달아 전적으로 예수님과 마음을 같이하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잡하고 힘겨운 인생들에게 꼭 필요한 고백이 있습니다. 마라나타, 즉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예수님께서 속히 오실 날을 고대하면서, 그날이 오기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5-04-2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부활하려면’(롬 8:11)
    그리스 철학자들과 플라톤은 영과 혼을 하나로 묶어서 사람은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과 영혼을 분리하여 육은 죽지만, 영혼은 불멸하여 끊임없이 윤회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플라톤이 주장한 영혼불멸설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영, 혼, 육이 다 죽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다시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모든 피조물 중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몸에서 떠나면, 즉영이 죽으면 사람의 심장에서 나오는 혼과 육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영, 혼, 육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의 몸에 하나님의 영이 다시 임함으로써 예수님의 영, 혼, 육이 다시 일으켜 세움을 받았습니다.(행 13:30) 어떻게 예수님의 영, 혼, 육이 죽을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신적인 것을 비우시고 인간적인 것으로 낮아지셨기 때문에 영, 혼, 육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빌 2:6-8) 죽음의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무서워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눅 24:38-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아직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눅 24:41)라고 말씀하셔서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더니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눅 24:41-43) 이처럼 예수께서는 육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육과 혼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영도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영, 혼, 육이 죽고, 성령님에 의해서 영, 혼, 육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사도신경을 보면,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육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 즉 영혼육이 부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영, 혼, 육이 죽었다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영, 혼, 육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런 부활의 몸을 바울은 신령한 몸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5:44) 신령한 몸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육의 몸이 새로운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즉 부활한 몸은 사람의 형상과 육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나 부활 이전 육의 몸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지상의 물질적 공간과 역사적 시간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신령한 몸도 지상의 몸과 초월의 몸이 연합된 것입니다. 즉 지상의 몸이 초월의 몸 곧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 부활입니다.예수님의 변모사건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마 17장) 우리도 부활하면 예수님처럼 지상의 몸과 초월의 몸이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으로 일으켜 세움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죽은 몸도 성령님에 의해서 일으켜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성령님에 의해서 사람이 다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타락 이후 사람에게서 이미 성령님이 떠났기 때문입니다.(창 6:3)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이 떠나시지 않도록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행 2:38) 부활하려면, “생명을 주시는 영”(고전 15:45)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 즉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인 다른 보혜사가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도 부활합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죄 때문인 것으로 시인하고 믿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 곧 생명을 주시는 영이 오셔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살고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5-04-2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삶이 곤고한 이유에 대해’(시 107:10~12)
    사람이 흑암과 죽음의 그늘에서 살며 쇠사슬에 매여 고통하는 죄수처럼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가르침을 거절하였기 때문임을 본문은 말씀합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사실과 진실을 콕 집어서 이야기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제각각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였었거나 매여있는 처지이거나 합니다. 어디가 흑암이며, 어느 부분이 쇠사슬에 매인 것일까요? 자기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온통 마음이 흑암에 싸여있고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으며 곤고해하고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매여있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환경과 삶의 터전 또한 그렇게 어두워지고 곤고해지며 매여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만드시고 바라보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간단하고도 명쾌하게 그렇게 곤고해지며 매여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서 사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이나 베드로같이 선교와 희생, 또는 애국의 일환으로 옥중 생활을 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옥에 갇히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고, 남을 해하지 말며, 살인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며, 간음하지 말며,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은 극히 도덕적인 내용이지만, 그 이전에 그러한 기준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감옥에 갇힌 적이 없다고 자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감옥은 아닐지라도 자기 마음이 이미 감옥인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게 되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있는 불행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감옥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러한 마음의 감옥은 이미 스스로 자초했던 잘못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랑의 중요성보다는 다른 관계나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사랑의 관계이어야 할 부부의 모습이, 현실을 살다보니, 배우자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거기에 푹 빠져있게 된다면, 이는 불륜이며 배신이고 범죄로 이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혈연 그 이상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멸시함에 따라 겪게 되는 고통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울 때는 엎드러져도 돕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12절).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며 어떤 상황에 놓여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감사와 평안입니까? 흑암과 쇠사슬에 매임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는 가운데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하여서 참된 사랑과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5-04-13
  • [특별 기고] 북한 노동당 당비서에서 목회자로 거듭난 복음 역경
    다음은 지난 4월 7일,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제23회 목사안수식에서 안수자 대표로 인사를 건넨 노희창 목사의 메시지 전문이다. <편집자 주> 존경하는 사단법인 국제독립교회연합안의 목사님들과 함께하시는 모든 참가자 여러분, 그리고 오늘 함께 안수를 받는 동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먼저 이런 귀한자리를 마련해주신 명예회장이신 박조준 목사님, 총회장이신 림택권 목사님, 사무총장이신 임우성 목사님,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목사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귀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며, 북한 복음통일을 준비하는 종으로서 저의 다짐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북한의 ‘정치적 난’으로 치부되었던 장성택사건의 측근으로 낙인되어 해외출장시에 북한을 이탈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전 북한노동당 중앙당 행정부 대외건설지도국의 당비서 였습니다. 북한에서 노동당은 종교를 탄압하는 최고의 정치기구이며 저는 바로 그 기구에서 일하면서 종교박해와 탄압을 일삼으며 많은 죄를 지은 자 였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에는 저를 이끄신 주님의 크신 뜻과 크신 노력과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시대마다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종들을 세우셨고, 오늘 이 시간 저희를 주님의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각오로 임해야 할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특히, 우리가 서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한반도의 복음 통일을 위해 일하시는 중요한 시기이며, 북한 땅에 갇힌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명을 깊이 새깁시다. 이 자리에서 제가 맡은 소명은 북한에로의 복음전파이며 이루어내야 할 결과는 복음통일입니다. 저는 현재 북한선교실천연합 회장으로서 북한선교를 실천함에 있어서 북한선교의 기본을 올바로 이해하고 북한선교에 대한 중심을 올바로 세우고, 북한선교에 대한 방향을 올바로 선택하고 북한선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북한선교의 중심은 요한복음 8장32절··· 진리를 너희가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말씀을 북한에 그대로 알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반대쪽 땅에서 사는 북한주민들은 세상속의 순리와 진리가 모두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 땅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오직 복음으로 이 민족을 하나 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철저히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하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과 동역자들앞에서 다짐합니다. - 어떤 환경에서도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한반도의 영적 회복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 북한과 열방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이 전파되는 그날까지 달려가겠습니다. 이 길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하신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두려움 없이 나아가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희를 위해 노력해 오신 사단법인 국제독립교회연합안의 모든 목회자분들과 함께 안수를 받는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기도로 함께하는 모든 참가자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길에 끝까지 함께 서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세우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5-04-0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하미자 목사의 ‘보혈의 능력’(벧전 1:18-19)
    우리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히 2:14-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갈 1:4) 그 보혈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의 멍에를 다시는 메지 않도록 믿음으로 굳게 서서 보혈의 능력을 전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대속하셨습니다.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은 영원하며 사람의 영혼육 전 존재를 구원하는 것이기에 더욱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죄에서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구속하다’는 ‘전쟁 포로나 노예를 돈을 주고 사서 다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보혈, 즉 몸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여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죄를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거룩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째, 영생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말은 보혈의 능력을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혈의 능력을 찬송해야 합니다. 구약시대 드린 동물의 피는 부정하게 된 사람의 몸을 의식적으로 정결하게 하였으나 양심을 씻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로 인해 더러워진 사람의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죽은 심령을 살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셨습니다.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쳐진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히 9: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써 속죄함을 얻은 그 기쁨을 영원히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가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268장)의 가사를 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도 보혈의 능력입니다.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도 보혈의 능력입니다. 주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보혈을 믿어야 합니다. 스가랴 13장을 보면,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샘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와 더러움을 씻어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히 9:11-12) 주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으로도 죄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바울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빌 3:10)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갈 6:14)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눅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자신이 주인이었으나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을 따라가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5-04-06
  • [국제교회논평회 논평] 탄핵 기각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증명해야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의 탄핵 여부는 우리나라 국민은 말할 것 없고 전 세계의 관심이 모인 최대 이슈입니다. 탄핵의 기각과 각하, 혹은 인용의 여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꿀 숨막히는 결정이 될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를 감히 밝히자면, 이번 탄핵이 반드시 기각 내지 각하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는 어느 개인을 지지하거나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법의 상식을 기대하는 당연한 바람입니다. 한 가지 더 기대하는 것은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롭게 각성한 우리나라가 부정선거 이슈를 완전히 정리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현재 다수의 국민들이 부정선거에 대한 의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혹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더욱 감추려는 듯한 그들의 행태는 오히려 국민들의 의심을 증폭시키고 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먼저 선거관리위원회를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기관으로 재편해야 합니다. 그 어디보다 신뢰와 공정을 담보해야 하는 선관위가 가족회사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우리 대한민국이 처한 불행이자 국민들의 수치입니다. 미개한 나라에서 존재할 이런 일이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가능할까요? 과연 이런 체제 속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떳떳할 수 있습니까? 의혹 앞에 당당하다면 오히려 감추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공개해야 할 것입니다. 선거는 국민들의 대표를 뽑는 국가의 가장 큰 중대사입니다. 국가의 미래와 다음세대의 운명이 선거에 달린 셈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선거가 굳이 편리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좀 더 번거롭더라도, 혹여 고생스럽더라도 한 점 의혹 없는 공명성을 취할 수 있는 길이라면, 결코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논란 많은 사전선거를 없애고, 개표는 선거함을 이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작업으로 해야 합니다. IT산업 선진국인 대만도, 세계 최고 선진국 중 하나인 독일도 수작업으로 하는 것은 전자개표가 편한 것을 몰라서일까요?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요 기본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탄핵이 기각되면 먼저 이 부분부터 바로 잡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만에 하나 탄핵이 인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굳건히 지켜질 것입니다. 그 어떠한 시련과 폭압 속에서도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라고 말한 패트릭 헨리의 절규가 우리의 부르짖음과 같습니다. 지금 광화문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 그 많은 국민들이 모여 우리 대통령을 돌려달라 부르짖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와 정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국민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 심성이 착하나, 불의 앞에 결코 주저하지 않는 뜨거움 가슴을 갖고 있습니다. 3.1운동의 치열한 외침과 4.19혁명의 목숨 건 투쟁은 이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 낸 이들이 바로 우리 대한의 민족입니다. 지금 대한의 민족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염려하며, 대통령 탄핵 기각을 간절히 부르짖고 있습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저항할 줄 아는 국민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자신을 하야케 한 4.19혁명을 오히려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지난 역사 속에서 불의 앞에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듯 이제 그 어떤 시련이 밀려와도 더 푸르른 저항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을 믿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5-04-0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완전한 구원자 예수’(눅 9:28-36)
    예수께서는 변화산 사건 직전에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가 바로 메시아이신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함께 드러낸 것이지요. 예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을 해야 합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의 고백이 우리 각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알려주신 수난 예고로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십자가 수난이 과정이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본문은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시러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영광을 본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할 때에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그 모습이 변모된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라는 사실과 장차 수난을 받으실 것과 다시금 주님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예언을 말합니다. 즉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이루는 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은 완전한 구원자이심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변화되시어 옷이 희어지고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제자들은 그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지요. 그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영적인 눈이 열려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고, 귀가 열려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때의 체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서 별세는 ‘출발, 밖으로 나가다, 어디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 별세는 출발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별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죽음을 출애굽으로 보았습니다. 애굽은 하나님 통치 없는 곳으로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죽을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아이 아버지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 소년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악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눅 9:37-43) 구약의 가장 큰 부분이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구출된 출애굽입니다. 신약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즉 출애굽과 십자가는 하나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죄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기 전 사탄의 종노릇한 것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 사함 받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5-03-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호연 목사의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성경은 그 시대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3:1). 그 시대는 사사 엘리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마지막을 보내던 시대였는데, 성경에 의하면 그는 눈이 어두워져 처소에 누워있기를 밥 먹듯 했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3:2). 그는 육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분별력을 잃어 가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아들들의 비리조차 꾸짖지 못하는 그러한 상태였다. 과연 이러한 시대에 이스라엘의 소망은 무엇이며,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저들에게 전하여 이 민족을 바로 인도할 것인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삼상 3:3). 하나님은 그런 사무엘을 불렀다(삼상 3: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첫째, 이 민족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이상이 희귀한 시대라도 하나님의 등불이 남아있는 한 소망은 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고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 민족을 각성시키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예비하여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불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게 하리라는 사실이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훈련받은 사사요, 선지자였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장막, 여호와의 궤 앞에서 잠을 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늘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힘썼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했겠는가? 말씀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종으로서 훈련받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랐다. 그는 선생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하고 두 차례나 선생에게 가서 “부르셨냐?”고 물었다. 엘리도 얼마나 영안이 어두워졌던지 두 차례나 그것이 하나님의 부름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가서 자라” 했다. 그리고 세번 째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부른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하라 했다(삼상 3:9). 비록 노쇠한 엘리였지만 사무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이어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데 마지막 소임을 다 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러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엘리의 두 아들의 불의함을 보았고 그들을 심판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엘리는 사랑하는 제자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 말을 다시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엘리에게 이 뜻을 전했지만, 그는 아들들에 대한 저주를 자청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나서 아들들의 비리를 금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삼상 3:13). 부정(父情)에 끌려 아들들을 망친 셈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이와 같이 되지 않았는가? 영안이 어두워져 이상이 희귀한 시대가 되지 않았는지? 인간적 정리(情理)에 휘둘려 스스로의 죄조차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빠져 있지 않은지? 최근 일부 모범이 되어야 할 위치에 있는 교계 인사들의 메시지나 행태를 보면서 과연 이 시대가 엘리의 시대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의한 세력이 나라를 뒤 흔들고 무도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어째서 비겁하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 뒤에 숨는가? 이 말씀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을 말한 것이지 네 자신이 심판의 위치에 서라는 말은 아닐 터다. “용서하고 화합하라”는 메시지를 듣기 좋으나 그것을 사단마귀의 세력에까지 확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을 말씀에 근거하여 영적으로 분별하여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섞어 얼버무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한 때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분들이 이로 인하여 삯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현 시국 한국교회는 사무엘의 영성으로 무장돼야 하리라.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로하면서도 경고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 했다(삼상 12:20-25). 그래도 박조준 목사님이나 김진홍 목사님 같은 원로들이 계신 것에 감사한다. 전광훈 목사님이나 손현보 목사님 같은 분들이 주동이 되어 교회를 일깨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주류 신학교 교수들이 좌경화 되어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와중에도 학생들이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한국교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장차 하나님이 이 민족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비전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하나님의 부름에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성심으로 응답하는 종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2025-03-2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담임목사로 산다는 것은”
    오랜만에 제주도를 갈 계획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러 가는 것은 아니고 집회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1박 2일 동안 세 번의 집회를 인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집회를 앞두고 다리 운동을 좀 무리하게 했었나 봅니다. 지하 3층에서부터 지상 9층까지 여러 번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나서 다음 날 봤더니 피부 이식을 한 발뒤꿈치 부분이 빨갛게 성이 나 있더라고요. 수술한 병원에 가보니까 무리하면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앞으로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총회 관계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제주 일정을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부고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로 김찬호 장로님의 빙모이시자 최성복 권사님의 어머니 김혜 권사님이 소천을 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조문소가 경남 밀양이었습니다. 밀양이라고 하는 곳은 저와 참 관계가 깊은 것 같습니다. 오래전에 밀양이라는 영화가 나왔지 않습니까? 저는 그 영화를 보고 굉장히 분노감을 가졌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죄의 은총을 마치 비아냥거리기라도 하듯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밀양시 기독교연합회에서 집회 초청을 한 것입니다. 저는 모든 일정을 다 제치고 밀양으로 갔습니다. 시립체육관에서 집회를 하는데 첫날 너무나 빈자리가 많았습니다. 보통은 그렇거든요. 첫날은 주최 측 동원으로 모이게 되지만 둘째 날부터는 강사의 실력으로 동원이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집회 두 번째 날은 자리가 거의 가득 찼습니다. 마지막 날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찼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최성복 권사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특별히 주변 교인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김찬호 장로님의 빙부이시자 최성복 권사님의 친부이신 최기주 장로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조문을 하러 직접 내려갔습니다. 제 생애 두 번째로 밀양에 간 것입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6년 후, 김찬호 장로님의 빙모이시자 최성복 권사님의 어머니이신 김혜 권사님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정말 조문을 앞두고 많은 씨름을 했습니다. 네비로 찍어봐도 정확히 4시간이 나오는 것입니다. 왕복이면 8시간이고 예배드리고 앉아 위로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 포함하면 9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김찬호 장로님께서는 극구 내려오시지 말아 달라고 사정을 하셨지만 제가 안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려가면서 어차피 저는 차 안에서 일을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전날 저녁에 설교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미리 써머리를 했습니다. 가는 길에 주일 낮 설교를, 오는 길에 주일 밤 설교를 불러주기 위해서요.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발뒤꿈치 상처 부위에도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잡는다든지, 속도를 낸 상태에서 회전을 하는 경우를 대비해서요. 실제로 그런 순간순간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락 한 단락 설교문을 이어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김찬호 장로님이 아니라면 간접 조문을 할 수가 있죠. 우리 김찬호 장로님은 우리 교회 재정부장을 10여 년을 넘게 섬기고 계시고 십일조도 최상위 그룹으로 하며 클라팜파 회장을 맡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김찬호 장로님 때문에 또 한 번 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가면서 설교 준비를 거의 다 했습니다. 설교 준비를 마칠 때쯤 차에서 좀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수요예배가 시작될 무렵이어서 유튜브를 켜놓고 수요예배에 참여를 하였습니다. 그날 김선명 목사님이 설교를 하였는데 통상 담임목사가 없으면 부목사가 설교를 하고 기도하고 축도를 하는 게 일반적이거든요. 그런데 비서실에서 담임목사가 오고 있다고 김선명 목사에게 시그널을 보냈나 봐요.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 기도하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냥 목사님이 축도를 하고 끝내시라”고 문자를 보내놨지만, 김 목사는 그 문자를 보지 않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거의 10분 가까이 광고하고 찬양하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부리나케 교회에 도착해서 강단으로 올라가서 기도하고 예배를 마무리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생각해 봤습니다. 담임목사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담임목사가 아니라면 밀양에 갈 필요도 없으며 담임목사가 아니라면 오가는 길에서 그토록 애를 써서 설교 준비를 할 필요도 없으며 담임목사가 아니라면 수요예배가 끝나기 전 부리나케 도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얼른 보기에는 담임목사에게 많은 힘과 권한과 명예가 주어진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담임목사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권한과 힘과 명예를 가진 만큼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죠.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목사
    2025-03-16
비밀번호 :